안녕하세요!! 오늘은 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라예보사건의 전말과 결과에 대해서 간단히 포스팅하겠습니다.
사라예보사건은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한
사건입니다.
세계대전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인류사적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대전으로 인해
병사900만명이상이 사망했고 약 7천만명의 군인이 참전했던
역사상 가장 컸던 전쟁중에 하나입니다.
사라예보사건은 이 전쟁의 불씨를 당긴 사건입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18세 청년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된 사건입니다.
당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의 보스니아인으로서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국인
세르비아와 합칠것을 원했다고 합니다.
이를 남슬라브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군대의 사열을 보기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프린치프와 4명의 혁명가 학생들이 음모를 준비합니다.
사라예보사건은 한번에 총으로 암살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황태자 부부가 탄 차에 폭탄테러를 가하려 했으나
운전사가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차 뒷바퀴에 맞아
뒤따라오던 차 밑에서 터져서 16명이 다치는 사고가 먼저 잇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친거라고 생각하여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가려고 했는데요
이 때 루트를 변경하여 지름길로 가기로 했으나 실수로 운전사에게
미리 말을 해 놓지 않아서 운전사가 길을 잃었고
골목길에 숨어있던 프린치프가 달려나와 총으로
황태자 부부를 암살합니다.
이 사라예보사건으로 일어난 결말은 비극이었습니다.
일단 사건이 발생한 사라예보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이자
프린치프 역시 오스트리아의 영토인 보스니아에 사는 세르비아계일 뿐
세르비아의 국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었는데요
그러나 세르비아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기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이 사라예보사건을 명분으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행합니다.
사라예보사건으로 인해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 동맹국이었던
독일제국의 협조를 요청했고
이에 동조한 빌헬름 2세는 무려 백지수표를 약속합니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을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표현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모든 반 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하고 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하고
반 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하며
사라예보사건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데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도울 것을 허용하도록 요구하고
이를 48시간 안에 대답하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거부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이를 빌미로
7월 28일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러시아가 7워 29일 총동원령을 내리게 되고
이어서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데요
이에 줄줄이 유럽의 각국은 서로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단 두발의 총알로 인해 900만의 목숨을 앗아간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