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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17. 16:10 카테고리 없음

안녕하세요 오늘은 민족의 아픈역사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고 불리우는 사건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볼게요

간도참변은 경신참변이라고도 불리우고

참변이 일어낫던 훈춘시의 지명을 따서 훈춘참변이라고도 불리웁니다.

간도참변의 주된 원인은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강제로 중국군을 동원하여

토벌작전을 실시하려합니다.

하지만 중국군이 먼저 독립군과 비밀리에 접선하여

독립군 부대들이 지린성으로 토벌을 피해 달아나게 되는데요

중국군은 빈 주둔지를 불태운 후 일본군에게

독립군이 도주해서 토벌에 실패했다고 보고합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중국측이 거부함에도 일본은 병력을 단도로 출병시킵니다.

하지만 훈춘에 있던 독립군들은 이미 안전한 곳으로

피난한 상태였는데요 이에 거병이 출병을 했지만

할 일이 없어진 일본군은 만주에 사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합니다.

이 것을 간도참변이라고 부릅니다.

이 때 약 3천여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살되었다고 전해지며

지역 자체가 초토화 되고 맙니다.

간도참변의 배경및 원인은 위에 나와있는대로

봉오동 전투에 대한 보복성으로 이루어 졌는데요

민족이 힘이 없으면 겪게 되는 이런 수모를 다시는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과외맨
2020. 6. 6. 19:10 카테고리 없음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자성어 하나 소개드릴게요

바로 사문난적이라는 말인데요

요즘도 무언가 싸움이나 전쟁을 할 때 명분이 어디에 있느냐가

정말 중요하잔항요

오늘은 그 싸움의 명분이 되어주었던

사문난적의 뜻과 의미 그로 인해 발생했던 사건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사문난적(斯文亂賊)은 그 단어의 뜻만을 살펴보면

유교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입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성리학 또는 유교의 이념에 반대하는 사상이나 사람을 공격할 때

쓰던 용어로서 여기서 사문은 유학을 가리키고 난적은 어지러운 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더 지엽적인 의미로서 사용되는데

유교중에서도 주자학 즉 성리학의 해석을 벗어난 학설을 펴는 사람을

비방할 때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사문난적이라는 단어는 고대 중국에서 사이비 학문으로

궤변을 펼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 사림이 정계를 장악한 명종 후반이후

많이 쓰이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문난적 사건으로는 주자학의 절대성을 부정한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남인의 영수이자 송시열의 정적인 허목 역시 주자학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학문도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

사문난적으로 몰립니다.

또한 송시열을 비난했던 윤선도가 사문난적으로 몰려서

매장당한 일도 있었습닏.ㅏ

그리고 박세당은 사변록을 통해 기존의 성리학을 비판하다가

역시 사문난적으로 몰린 사건이 있습니다.

유학이 우리나라의 체제의 정비와 사상적으로 발전시킨 부분이 분명히 크지만

너무 골수가 되면 사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때로는 죽이기 까지 하는 걸보면

뭐든 역시 적당한게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posted by 과외맨
2020. 5. 22. 16:07 카테고리 없음

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려말 공민왕대에 꺼져가는

고려의 마지막 불꽃을 키우기위해 노력했던

공민왕과 신돈 그리고 신돈의 전민변정도감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 보려고 합니다.

신돈의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의 개혁기관으로서

나라를 좀먹던 권문세족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

국가의 재정과 기반이 약화되자 이를 시정하기위해

설치했던 일종의 임시특별기구입니다.

공민왕 집권시기의 승려였던 신돈이 왕에게 주청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는데요

주된 기구의 역할은 권문세족에게 부당하게 빼앗긴

백성들의 토지와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복귀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것을 통해 권문세족들의 경제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의 기반을 다지려고 합니다.

고려 중기 이후에 벼슬하는 사람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토지를 사유화 함으로써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과중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여

노예로 전락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전민변정도감은 원래 원종 충렬왕 공민왕 우왕대에도 설치가 되었지만

신돈의 전민변정도감이 가장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기에 가장 유명합니다.

posted by 과외맨
2020. 5. 21. 16:30 카테고리 없음

안녕하세요^^ 오늘은 시험에 잘 나오는 고려시대의

큰 사건을 하나 소개해 볼까 합니다.

혹시 단재 신채호선생님 들어보신적 있으신가요?

신채호 선생님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두고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민족사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는 사건인 묘청의 난을두고 신채호선생은 아래와 같이 평합니다.

낭가 대 유가 국풍 대 한학

독립 대 사대 진취 대 보수의 싸움이라고 말이지요

묘청은 전자의 대표이고 후자의 대표는 삼국사기로 유명한 김부식입니다.

그럼 민족사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인 서경천도운동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닏.

묘청의 난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배경은은 고려 인종때에

국제적으로 북장에서 여진이 힘을 길러서 금나라를 건국하고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맺자며 스스로를 형이라고 자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국제정세가 이러한 상황에 놓이자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지세가 다하여

주변나라가 고려를 업신여기고 있다며 지덕이 좋은 서경으로 천도하면

36방의 주변나라들이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라고 묘청이 진언합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금국정벌론을 내세우기도 하였지요.

묘청은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한 인종의 최측근인

정지상을 회유하여 인종에게 접근합니다.

묘청은 풍수지리사상을 기반으로 개경의 지세가 다하여

서경으로 천도해야함과 동시에 칭제건원(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할것)을 주장합니다.

당연히 묘청의 이러한 주장들은 기존 개경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행사하던 문벌귀족들의 눈에 거슬리는 상황이 됩니다.

이들의 지지 기반이 개경이니 당연히 천도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싫을 수 밖에요

개경 귀족들의 위세가 만만치 않자 묘청의 서경천도운동도 당연히 주춤하게되는데요

이에 불안을 느낀 묘청은 사기를칩니다...ㄱ-; 진짜로요

바로 인종이 묘청과 함께 서경으로 가던 중 큰 폭우를 만나

많은 인마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때 기름이 들어간 떡을 강에 던져 기름떡에서 흐른 기름이

수면에서 빛이 났고 이를 용이 침을 토햇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 기운을 받아 금나라를 공격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인종은 결정을 미루고 이 용의 침을 조사하게 하는데요

묘청이 기름떡을 가지고 왕을 농간한 것이 탄로납니다.

이에 따라 묘청과 정지상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김부식이 서경행차를 반대한느 상소를 올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되죠.

그렇다면 묘청이 서경천도를 그냥 포기하느냐?

아닙니다. 실제로 묘청은 난을 일으킵니다...허허

서북면일대에 나라이름을 대위국 연호를 천개라고 하며 군대까지 만들고

개경으로 진입할 뜻을 품게되죠.

하지만 조정에서는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하여

진압군을 파견하였고 출정에 앞서 정지상일파를 제거한 김부식은

서경을 공략합니다.

서경주변을 먼저 포위하고 마지막에 서경을 공격하는데요

결구 ㄱ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제압하였고 이후 고려는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묘청의난의 중심이 되었던 서경의 지위가 크게 떨어졌고

고려권력의 균형이 깨져버려서 개경 문신귀족들을 견제하던

서경파가 쇠퇴함에 따라 개경의 문신귀족은 견제받을 세력없이

권력의 독주를 하고맙니다.

문벌귀족들의 하늘 높은 줄 모른느 행타와 무신을 멸시하는 풍조로인해

후에 무신정변이 발발하게 됩니다.

posted by 과외맨